[펌글]시각장애 1급 김진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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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대구출장안마 신체 가운데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겠지만 흔히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한다. 눈이 그만큼 소중하고 여러 가지 의미로 중요한 부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을 잃게 되면 함께 잃게 되는 것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손실은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것 일게다. 그러나 다행히도 눈을 잃어도 글은 읽을 수가 있으니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가 있기 때문이다. 점자로 글을 읽고 쓰고 공부를 하면서 점자가 있어서 더 재미있고 행복한 사람이 있다.‘너 그거 아니? 깜깜한 밤중에 전기불이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점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 눈을 잃어도 불행하지 않고 점자 때문에 더 행복하다는 사람.김진(36)씨의 고향은 부산 동구 좌천동인데 그는 그 고향집에서 태어나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 부산의 동구 좌천동은 가구거리이다. 1년에 한 번씩 가구축제도 하는 곳이다. 가구거리에 살고 있었으니 그의 아버지는 가구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김용석(작고) 어머니 이용자(60)씨의 사이에서 삼남매의 둘째로 위로 누나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그가 태어날 무렵만 해도 아버지는 가구점을 하시고 어머니는 따로 식당을 하셨다.살림밑천이라는 첫 딸을 낳고 둘째로 아들을 얻었으니 부모님은 더 바랄게 없는 행복한 소시민이었다. 첫딸로 그렇고 둘째 아들도 아무 탈 없이 잘 커 주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돌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으로 갔다. 딸랑딸랑 자 여기를 보세요. 렌즈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이 이상했다. 대구출장안마 어머니도 그동안 아이의 눈이 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커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더란다. 그런데 사진관에서 보니까 아이의 초점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천성인 것 같다고 했다. 행여나 싶어 병원을 전전했으나 병명도 몰랐고 치료약도 없었다. 대부분의 장애인 가정이 다 그렇겠지만 처음 장애를 알고는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심정으로 병원을 전전하기 마련이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을 때에야 포기를 하거나 다른 길을 찾게 마련이다. 김진씨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병명도 모르고 치료약도 없었으나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조금아니마 용하다는 병원이 있다하면 아이를 데리고 어디든지 달려갔다. 물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희미하게 사물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적령기가 되었다. 마침 외가가 송도 맹학교 부근에 있어서 부모님은 맹학교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었기에 맹학교에 보내기로 결심을 하고 아이를 맹학교로 데려갔다. 그런데 맹학교에서는 아이가 보인다며 안 받아 주었고 혜성학교로 가보라고 했다. 혜성학교에 갔더니 지능이 정상이라고 안 된다고 했다. 일반학교에서는 눈이 나쁘다고 안 받아 주고, 맹학교에서는 눈이 보인다고 안 받아 주고, 혜성학교에서는 지능이 정상이라고 안 받아 주고, 아이를 입학 할 학교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학교에 가고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 어머니는 한글과 숫자를 가르쳤다. 동네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친구들과는 같이 잘 어울려 놀았다. 위의 누나가 5학년 생일날 누나의 담임선생이 가정방문 대구출장안마 겸 그의 집에 왔다. 담임선생은 학교도 가지 않는 아홉 살 동생을 보고는 ‘애를 이렇게 두면 안 된다.’며 걱정을 하셨다. 그리고는 집 근처에 있는 성남국민학교에 주선을 해 주어서 다음해 봄 다른 아이들 보다 두 살이 많은 10살에 1학년 입학을 했다. - 지금은 만 6살이지만 그 무렵은 우리 나이로 8살에 1학년 입학을 했다. 김진씨의 삶 ②편에 계속[설문조사]2006년 장애인에 대한 정부와 사회 관심 줄었나, 늘었나?칼럼니스트 이복남 ()목회자를 꿈꾸며 신학과를 갔으나시각장애 1급 김진씨의 삶②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6-12-28 15:28:12
어머니에게서 한글과 산수를 좀 배웠기에 국어 산수 사회 자연 등 공부를 따라 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산수 사회 자연은 100점을 받았는데 국어에서 4문제나 틀렸다. 국어문제는 ‘다음 그림을 보고 맞는 것 끼리 줄을 이으시오’라는 문제였는데 왼쪽에 ‘아버지 어머니 원숭이 선생님’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오른쪽에는 그림이 있었다. 그는 그림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데나 줄을 그었는데 그게 다 틀렸던 것이다. 교무실에서도 김진의 답안지를 놓고 선생님들끼리 말이 있었던 모양인데 김진이 눈이 잘 안보여서 그림 문제가 틀렸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고는 담임선생은 그에게 반장을 시켜 주었는데 4학년 때까지 줄곧 학급 반장을 했다. 그는 공부도 잘 했고 반장 역할도 잘 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시험지 글씨는 점점 더 작아졌고 글씨가 작아지는 만큼 그의 성적은 점점 더 떨어졌다. 특히 자연 과목은 글씨는 작아지고 그림이 많아져서 성적이 대구출장안마 좋지 않았는데 4학년 2학기 자연시험에서 60점을 받고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서는 학교를 안 다니겠다고 했다.
그 무렵 서울로 출장을 가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의 눈을 고쳐 보려고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을 만 했는데 그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하시던 가구점을 맡아서 삼남매를 힘들게 키우시는데 둘째가 성적이 안 나온다며 학교 가기를 싫어하니 하는 수 없이 다시 맹학교로 데려 갔다. 이번에는 맹학교에서 받아 주겠다고 해서 5학년 때 맹학교로 전학을 했다.맹학교에서 처음으로 점자를 배우는데 너무나 신이 났다. 그는 항상 큰 글자를 밝은 곳에서만 겨우 읽을 수 있었는데 점자를 배우니 깜깜한 밤중에 불 없이도 책을 읽을 수가 있었고, 더구나 책상 앞이 아니라 방바닥에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는 일반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는데 맹학교에 와 보니 일반학교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 과학실험 용구 등 일반학교에 다닌 경험으로 여러 가지 건의를 했었는데 6학년 과학의 날에 과학기술처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동구 좌천동에서 서구 남부민동에 있는 맹학교까지 통학버스를 타고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자 통학시간을 아끼려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공부를 하노라고 했지만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대구대학 특수교육과를 가고 싶었으나 성적이 되지를 않아 재수를 생각하면서 진로상담을 하러 갔더니 선생이 신학과를 권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재수를 할까 신학과를 갈까 많이 망설이다가 신학과를 택하기로 했다.부산신학대학 신학과에 대구출장안마 입학을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목회자가 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처음으로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신학과니까, 장차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책도 읽어주고 점자도 찍어 줄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웬걸, 그것은 순전히 그의 착각에 불과하였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서의 큰 불편을 못 느끼고 살았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것이지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들이 통합교육을 너무나 잘해 주신 것 같았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미술시간까지 일반 아이들과 똑같이 평가했기에 미술점수는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체육시간 만큼은 비록 그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최고 였다. 3~4학년 때는 야구를 하면 당연히 그가 심판이었다. 아웃이냐 세입이냐, 스트라이크냐 볼이냐의 시비도 정확하게 판정해 주었던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야구장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상황설명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대학에서는 공부할 양도 많을뿐더러 전부 다 자기 공부하기에 바빠서 옆에 시각장애인이 있어도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는 아예 점자 교재도 없었다. 교재가 없으니 공부를 따라 갈 수가 없었고, 동아리 같은 곳에 가 봐도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는 것 같았다. 미래의 목회자를 꿈꾸는 사람들이 바로 곁에 있는 시각장애인 하나 도와주지 않다니, 신학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많이 힘들고 외로웠다. “대학 다니면서 재수 하지 않은 것을 많이 후회했습니다. 제가 생각해 봐도 자립심이나 결단력 같은 게 대구출장안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동료들이 공부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에게 도움 받는 것을 포기하고 어찌했던 이왕 들어 왔으니 졸업이나 하자 싶어 혼자서 공부 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베데스다장애인선교회에서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귀한 분을 만났다.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를 점역해 주는 봉사자들을 만난 것이다. 가정주부인 김정순씨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독일어를 점역하는 유일 한 분이 아닐까 싶었다. 덕분에 독일어 시험에서 다 맞은 것 같았는데 성적표를 받아 보니 B였다. 조직신학 과목인데 최종호 교수를 찾아 가서 만점인 것 같은데 왜 B냐고 따졌다. 교수는 시험지를 가져왔다. 독일어 시험을 치면서 대필자는 누나였는데 누나가 독일어를 몰랐던 것이다. 움라우트 즉 ä글자 위에 점 두 개를 빼 먹었던 것이다. 교수는 그의 원 시험지를 확인하고 그가 만점을 받았음은 인정해 주었으나 학점을 고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성적이 잘 나온다고 늘상 불평이고 불만이었다. 한번은 최종호 교수가 다른 학생들에게 그의 시험지를 보여 주면서 ‘김진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성적을 잘 주는 것이 아니라 실력대로 평가 한 것이다.’고 일갈 했다고 한다. 김진씨의 삶 ③편에 계속칼럼니스트 이복남 ()중증장애인의 사회진출에 헌신하고 싶다시각장애 1급 김진씨의 삶③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6-12-29 15: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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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석으로 졸업을 했다. 에큐메니칼(Ecumenical, 교회 일치 및 연합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장애인선교단체에서 대구출장안마 교육전도사로 일을 했다. 대학교 때 장애인선교회에서 점자를 가르치면서 농아 뇌성마비 등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을 많이 만났었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어머니와 함께.그렇잖아도 신학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장애인복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를 필요로 하는 곳 즉 장애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갔다. 양로원 선교회 복지관 교도소 등에서 기도 찬양을 인도하고 점자를 가르치고 안마를 봉사했다. 사회복지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주 1회 점자도서관에서 5년 째 점자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점자도서관에서 점역교정사로 일을 해 보라고 했다. 대학원을 갈 것이냐 점자도서관에 들어 갈 것이냐 또 다시 기로에 서게 되었다.그 무렵 그가 가르치는 선교회 학생 중에 맹학교 5년 후배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많이 외로운 여학생이었다. 같은 시각장애인이고 신앙적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점자도서관에 취직을 하고 그 여학생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서로가 힘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담만 주게 되었다. 그는 시각장애인 아들을 아버지도 없이 홀로 대학까지 보낸 어머니를 위해 점자도서관에 취업을 하고나서 첫 월급부터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큰 자랑이자 보람이었다.
▲맹학교 초등부 졸업식날의 김진씨.결혼을 하고서도 월급은 여전히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아내의 주변에서 이것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남편이 월급을 왜 아내에게 주지 않고 어머니에게 주느냐. 아내는 경제권이 없느냐는 등 이렇게 시작된 갈등이 누적되어 가정불화가 잦아지고 서로에 대한 골이 깊어져 결국은 결혼생활 대구출장안마 5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는데 아이는 없었다. “제가 별로 고생도 안 해 보고 자라서인지 중간역할을 잘 못해서 아내를 힘들게 한 것 같아 아내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한편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지난 날 함께 어울렸던 장애인들이 모임을 하나 만들자 하여 ‘두레벗’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친목단체로 시작하였으나 장애인과 비장애인 의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상화복지회’로 발전하면서 장애인검정고시반을 운영하였다. ‘상화복지회’가 ‘부산장애인자립센터’의 전신이다. 그의 집은 아직도 좌천동에 있다. 아침 8시쯤이면 집을 나선다. 지팡이도 없이 희미한 빛을 따라서 좌천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면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 타고 점자도서관이 있는 덕포동에서 내린다.
▲도서관에서 점역 교정을 보는 김진씨.점자도서관은 울퉁불퉁 골목길을 20여분 걸어가야 하는 산 중턱에 있다. 하루 종일 점역하고 교정보고 자원봉사자들 관리하고 때로는 밖에 출장도 나간다. 그러나 그의 일상은 퇴근 후가 더 바쁘다. 장애인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진로상담 내지 인생상담을 하기 위해 그를 찾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학원 진학을 위해 틈틈이 영어공부를 해 왔는데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합격을 했다. 2007년 봄이 되면 10여년을 꿈 꿔왔던 대학원생이 된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 다만 장애인이 사회적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필요한 학습도구 편의시설 등 여건은 만들어 주어야 한다. 점자책을 만들어 주는 것도 보람이기는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장애인들에게 사회진출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원하는 대학원에 합격도 하였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꼭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끝. 칼럼니스트 이복남 대구출장안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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